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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노트

[생각 노트 05] 영어면접 그리고 작은 깨달음

난양공대에서 3학기 동안 튜토리얼 (Tutorial 소규모 그룹 강의)을 진행했다. 정확히 말하면 튜토리얼 강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영어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었다. 한국 대학에서 영어 전용 강좌를 몇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영어로 강의를 하는지 전혀 감이 없없다. (그 강의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건 영미권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았다고 다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첫 학기 수업은 정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구실 동료들에게 나의 감정상태가 수업 전날은 "분노" 수업 날은 "긴장" 수업 다음 날에는 "좌절"이라고 농담반 진담반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3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하니 잘하지는 못했지만 영어로 강의하는 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영어로 좌절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교원 지원서를 넣은 미국 대학에서 화상 면접 요청이 온 것이다. 화상 면접이라 스크립트도 만들고 연습도 여러 번하여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면접 당일, 화상 면접에서 대참사가 벌어졌다. 면접관이 말하는 영어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게 아닌가. 물론 긴장한 탓도 있었겠지만, 질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 박동수는 올라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냥 준비한 스트립트 중 가장 관련있을 것 같은 것 하나를 그냥 말했다. 당연히 분위기는 싸 해졌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면서 면접을 마쳤다. 결과는 뭐 예상대로. 

 

환상적으로 망한 면접이 끝나고 내가 영어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고 자책했다. 몇 개월 후 싱가포르 대학 최종 면접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전 면접 실패를 경험 삼아 더 철저히 면접 준비를 했다. 그리고 최종 면접실에 들어갔다. 면접실에 들어가니 나를 가운데 두고 면접관들이 나를 죽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짧게 10분 프리젠테이션을 한 후 40분간 면접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경험을 하게된다. 이전 면접과 달리, 면접관들이 하는 질문들을 너무 잘 들리는 것이었다. 면접을 무사히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왜 이번 면접에서는 영어가 잘 들렸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몇 개월 사이에 영어가 일취월장 했을리는 없고.

 

내가 찾은 답은 "익숙함"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싱가폴 영어에 익숙해져 있었던 반면에 미국 영어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영어라도 한국사람들은 호주 영어나 인도 영어가 잘 들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어느 뇌과학 교양서에서 읽었는데, "우리의 뇌는 예측하면서 보고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뇌가 예측하는데에는 기억(지식)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즉 영어 실력을 늘리려면 영어에 대한 많은 지식(문법, 어휘 등) 뿐만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문화적 맥락 (미세한 뉘앙스, 억양, 패턴)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에겐 큰 깨달음이었다. 결국 영어 공부법도 자명하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야 한다.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영어에 많이 (강제적으로라도) 노출되어야 하고, 영어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며, 자주 써야하고, 또 그 사회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공부법은 명쾌하지만 참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