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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노트

[생각 노트 04] 누군가 교수가 되는 길을 묻는다면

내가 박사학위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2009년 2학기 무렵이었다. 지금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 큰 포부가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졸업 때 취업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취업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맘 한켠에 왠지 취업을 하면 회사 생활에 잘 적응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자명했다. 나는 회사 생활을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 적성에 맞는 일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공부를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박사가 되고 싶었고, 나중에는 교수라는 멋져 보이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해외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금전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다. 국내 학위가 해외 학위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적이 뛰어나면 나중에 교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순진했다. 

 

대학원에 합격하고도 진학에 고민이 많았다. 정말 이것이 옳은 길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민만 계속되고 답을 찾을 수 없어 4학년 2학기 어느 전공 선택 수업 강사님에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물었다. "저 박사님, 국내에서 박사를 하고도 교수가 될 수 있나요?" 그 강사님은 국내에서 박사를 한 분이었다. 그 강사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안돼. 한국에서 교수하려면 무조건 미국에서 박사를 해야해. 한국 대학은 국내 박사를 안뽑는다. 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서포카) 정도가 아니면 몰라도. 네가 교수가 되고 싶다면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면 안돼."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질문한 내가 당황했다. 그땐 이미 국내 대학원을 진학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미 엎질러진 물 내가 국내 박사로도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국 나는 국내 대학원에 진학해 우여곡절 끝에 5년 만에 석박통합과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 박사 학위라는 핸티캡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논문을 썼다. 박사를 졸업할 때 쯤에는 상위 SCI 저널 논문 실적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고 박사후 과정 소위 말하는 포닥 과정을 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국내 대학원에서 2년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3년간 포닥으로 일했다. 운이 좋게도 싱가포르에서 나름 유명한 펠로우십에 선정되어 연구 책임자로 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학위 기간도 그랬지만 포닥 기간도 쉽지 않은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5년 동안 31번 국내외 대학교에 교원 지원서를 썼다. 한국 대학교에 지원하는 동안 한국 대학과 교수 사회가 국내 박사를 어떻게 바라보는 지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 그 때 그 박사님이 나에게 그런 답변을 주었는지 온 몸과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 많은 지원 중 서른 번 낙방 했고, 단 한번 성공 했다. 그리고 그 한번의 성공은 한국 대학이 아니었다. 지원한 학교에서 교수직 오퍼를 받은 순간은 돌이켜 봐도 초현실적이었다.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결과만 놓고 이야기 하면 나는 소위 서포카가 아닌 국내 박사 학위로 결국 교수 오퍼를 받았다. 해피 앤딩이었다. 그런데 문득 나도 후배들에게 아니면 학생들에게 "교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해야하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답변을 생각하던 중 갑자기 머릿 속에 확률 분포가 떠올랐다. 통계학은 사건이 일어날 확률로 어떠한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확률적으로 접근했을 때,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날 아마도 확률은 5% (통계에서 말하는 유의수준)도 체 안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통계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에게 "국내박사를 하면 교수가 될 수 없다."고 답한 그 박사님의 대답은 맞는 말이다. 통계학에서 나와 같은 케이스는 이상치 또는 아웃라이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쓴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국내 박사 학위로도 교수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정짓지 않고 조심스럽게 답변을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 만약 네가 아웃라이어가 된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다면." 건투를 빈다. 그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